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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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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을 형성하는 많은 사상들에는 새로울 것이 없다. 

ㅅㅁ가 블로그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고 내가 전에 쓴 것처럼,

우리에겐 우리만의 새로운 생각이란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어린 시절부터 한 인간의 주변을 둘러쌓고 있던 그 기억들이 한 인간을 형성한다.

기억들은 한 개인을 쌓아나간다. 

그 기억들 속에서 독립된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속 올리버의 삶이 보여준다. (그리고 접힌 부분에 첨부한 그림 사진이. ) 

자신을 형성한 기억들에 깔려 있는 한 인간. 


한 개인의 인격 형성 과정은, 사실 생명의 생물학적 형성과 전혀 다를바 없다. 

부모의 유전자, 그마저도 전대에서 물려받아 새로울 것 없는 유전자, 를 적절히 조합하면 새로운 생명이 나온다.

그렇지만 그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는 것은 새로운 생명체의 몫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종족의 특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환경에 적응하여 진화하는 방법이다.

단지 생물학책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마저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유전자는 반으로 잘려 새로운 조합을 이룰 때 고통을 못느끼지만,

두 사람이 진화를 위해 자신의 반을 잘라낼 때, (약간의 카타르시스와 함께) 아픈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그 뒤의 새로운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는 이를 감내하게 한다. 


게이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의 관계가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서로 다름에 어쩔줄 몰라하는 두 서툰 어른이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남기는 상처이기 때문이다. 

그 상처의 결과인 새 생명(올리버)이, 온전히 기억에서 독립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은 그 이유다.


영화에서 올리버는 그래도 발을 디딛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애나가 있기에 그 시도는 아름답다.

자신의 삶을 버텨내는 것도 역시 힘든 애나는, 올리버를 끌어안는다. 

이 영화가 질투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


전혀 다른, 성격부터 배경까지, 두 인간이 만나 서로를 끌어안는다.

결국은 그들은 '우리'라는 관계의 시작에 직면함으로서, 진화를 꿈꾼다. 

진화는 같은 두 유전자의 자가 복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두 유전자가 더해져 이루어진다.

새로울 것 없는 그 일을,  우리는 38억년 째 반복하고 있다.


진화는 도전하는 자의 몫이기도 하다. 

올리버가 먼 길을 떠난 것은 도전이다. 

진화는 운이 좋은 자의 몫인 것도 같다.

애나가 빠알간 드레스를 입고 다시 문을 연 것은 올리버의 행운이다.

애나도 도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진화의 시작을 이야기한 영화에서 떨떠름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 운이 너무 커보여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결말에 오히려 관대할 수 있었다.


무비테라피란 이런 것인지도.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는 것.


p.s : dvd 빌려주신 ㅎㅈ누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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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ulebi




일천구백육십사년의 한국.이 존재하긴 했던 것일까.

그 시절 사람들의 그 마음들이 모이고 모여, 이 나라가 된 것일까. 

그 때 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던 괴물들은,

조금도 변함없이 지금 우리 마음 속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교과서에서 이름을 봤던 김승옥 작가의 작품인데,

'ㅈㅂ는 아마 읽었을꺼야' 라고 했던 말을 전해 듣고, 부끄러운 마음에 꺼내들었다.

마지막 장의 버튼을 읽은 순간에는, 정작 그 말을 했던 이의 전해들은 의도와는 다르게,

하염없이, 하염없이 허무해져버렸다.


세 편의 중단편이 엮여있었다.

서울, 1964년 겨울.

역사.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서울, 1964년 겨울'을 읽으면서는,

어떻게든 자기 존재를 확인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이들의 처절한 대화가 인상깊었다.

자신만이 경험한, 자신만의 순간을 서로 뽐내면서 자기 존재 확인을 하는 두 이를 읽으며,

어쨌거나, 나. 에 대한 확신없이 살아가는 것이 어찌나 힘든 일일까 생각하였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돈으로 보상받았지만, 그 돈만큼이기나 견디기 힘든 외로움, 

혹은 자기 부정의 길의 끝인 자살.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결국 우리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런 불확실성은 채워주기 때문에, 그를 잃고만 술에 취한 아저씨는 끝내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야 만 것인지도.


'역사'는, 빈민가에서 살다가 양옥집에 하숙으로 들어간 한 남자의 반항기인데,

전후에 무너진 우리 사회에서 '정형화된 생활 패턴'이란 것이 등장하던 시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 틀 안에서 만족을 느끼기 시작하는 이들과, 그에 대한 반항기.

양옥집에서 흥분제를 마시고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그 '할아버지'는 내가 아닌가.


마지막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도시에서 해매는 오빠에게 전해온 누이의 출산 소식.

오빠는 억지로 보내놓은 도시에서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고향에 돌아와 말없이 우는 누이를 아파한다.

고향은 거꾸로 흐르는 강과 해풍이 누이를 치유하는 곳이다.

치유받은 누이가 한 생명을 만들어낸 것에 대해 도시의 오빠는 자리잡지 못한 생각들을 쏟아낸다.

글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 누이에게 쓰고 싶던 편지의 한구절 ㅡ 
'도시에 가서 침묵을 배워 았던 네가,
도시에서 조리에 맞지 않는 감정의 기교만을 배운 나보다 얼마나 훌륭했던가' '


라는 문장을 통해 누이를 향한 위로와 사과가 이루어진다.

'조리에 맞지 않는 감정의 기교'라는 표현이 참 쓰라리다.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인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우려고, 

감추고, 구미에 맞는 감정만 풀어내는 우리의 감정 기교 대결 속에선,

차라리 침묵이 답인지도. 

감히 침묵의 위대함을 익히지 못해 여전히 상처주고 상처받는다.


감히 쓰자면, 1960년대의 위대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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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ulebi





독후감의 탈을 썼지만, 개인적인 푸념들.


그런 시기가 있다.

세상의 모든 글, 상황, 대화가 한 방향을 가리키는 시기. 

굳이 어떤 것을 생각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세상이 내게 말하는 시기.


최근에 세상은 내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렴. 뭐든지.'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이상 단순하고, 어려울 것도 없는 진리인 것 같은데, 새삼스럽다.

과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안하고 있는가 라고 자문하면,

또 그건 아닌거 같은데 말이다.

그래도, 그래도 세상은 내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란 말을 한다.

그런데, 막상 내가 원하는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세상은 그것을 주지도 않는다.

하. 그것 또한 모르는 일도 아닌데,  서운한 마음은 감출 길이 없다.

서운하고, 

서운하고, 

서운하고,

서운하고,

서운하다.


'남자의 물건'은 명사라고 불릴만한 이들의 소중한? 물건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

이 시대 남자들의 존재 확인과 그를 통한 기 살리기에 나선 책이다.

이 책이 타겟으로 삼는 '남자'의 이야기에 폭풍공감하기엔, 

그 타겟 남성 독자층과는 20년 정도의 차이가 있는 듯 하지만, 

솔직히 읽는 동안은 즐거웠다.


처음 반절만큼은 저자인 김정운 교수의 자전적인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심리학 이야기가 담겨있다.

뭐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담겨있지만, 결국 골자는 '하고 싶은거 하라' 인 것 같아서, 서론이 길어졌다.

한국 남성들의 불안과 무기력증은, 

대부분이 '하고 싶은 일' 조차 없다는 것과, 설사 있다하더라고 할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갖고 싶은 것 혹은, 열정적인 관심 쏟을 일이 없는 내 현실, 

하고 싶은 것들을 맘놓고 할 수 없는 (물론 용기가 부족한 탓이 더 크지만. ) 내 현실 때문에

20살을 족히 많은 아저씨들을 향해 쓴듯한 이 책의 내용들이 가슴을 후벼파는 것인지도.


즐겁고 싶다.



라고 쓰는 것마저, 나에 대한 기만처럼 느껴진다.

난 정녕 즐겁게 살고 싶어하긴 하는건가?

아님 나야말로, 그 즐거움으로 가득한 현실을 마주할 용기조차 없어, 

외면하며 스스로 늪에 빠지고 있는 것인가.


아. 어쩌면, 즐겁게 살고 싶어 도전했던 길에 놓친 것들,

혹은 놓쳐버릴 것 같은 것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막상 발걸음조차 내딛지 못하는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안 부리는 것도 아닌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돌파구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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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ule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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