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22. 14:08

어느덧 한달 하고도 5일이 지났다. 

10,000하고도 933km를 더 떨어진 이 곳에 떨어진 날의 얼떨떨함은 여전하다. 

몇번이고 탔던 장거리 비행인데, 비행기는 왜 그리 낯설던지.

여행을 하며 두번 갔던 곳은 늘 반가워하던 나였지만, 

다시 만난 Porter square가 마냥 반갑지는 않았다. 

내가 많은 시간을 보낼 일상의 장소임을 깨닫고 질려버린 탓이었을까.


텅빈 방 안에서 가구 하나 없이 침낭에 의지하던 첫 나흘은 정말 암울했다.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채 오로지 이 아파트에만 속한 존재 같은 느낌.

그건 정말 묘한 경험이었다. 새로운 세계로 나가기 전 고치 속에 숨어들어간 애벌레 같은. 

고치에서 나온 후, 나비보다는 불량 나방에 가깝지만.


한달이라는 시간은 3년의 계약 기간에서는 꽤 긴 시간이지만, 

정착의 관점에서는 그리 길지 않았다.

여전히 집은 텅 비어있고, 매일 필요한 물건이 머리 속에 스쳐간다. 

운전 면허는 아직 신청도 못했고, 연구실에는 모니터도 없이 오래된 맥북만이 골골거리는 중이다. 


나 또한 지난 한달을 골골거리고 있었다.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면서, 독립된 인간으로서 나의 가치는 3살짜리만도 못했구나 싶었다. 

빨래, 밥하기, 청소, 내가 살 공간을 만드는 거의 모든 과정에서 나는 백지와도 같았다. 

한달이란 시간 동안 마구잡이로 집히는 데로 색칠은 해놨는데, 망하지만 않기를 바랄뿐이다. 


연구자로서의 능력에도 회의를 갖게 된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나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저 흐름에 순응한 하나의 이파리에 지나지 않았다.

심각한 문제이고, 어서 방향을 바꿔야한다. 식물인간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이제 지난 한달을 딛고, 35개월을 살아야한다. 최대한 멋진, 나비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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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ule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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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0.30 15:44

    물건 살 때를 제외하고 운전면허 없이 지낼 만 하지 않은가?:) 이번에 케임브리지 못 갔어.. 아나폴리스에서 학회가 있었는데 두 곳을 다녀오기에는 일정이 안 맞더라고.

    • 2015.11.02 10:30 신고

      물건 사는게 문제에요 ㅎㅎ 한번에 많이 못사니까 마트에 자주가야해서 좀 귀찮네요. 이번에 오셨으면 재밌었을텐데..! 다음에 기회되면 놀러오세요~!

  2. 2015.11.22 13:04

    나도 20살에 고향에서 수원으로 와서 첫날밤에 밥솥이랑 단둘이 누워 암울해했지ㅋㅋ 점점 나아질 것이여!

  3. 2016.02.12 01:39

    잎파리 아니고 이파리...

  4. 2016.02.15 15:32

    오랜만에 들어와봤는데 여기에 너의 적응기가 있구나 ㅎ 종종 올려줘 이따금 생각나면 들어와볼게!